[한국 4] 1948년, 신생 대한민국의 정당성 위기

1948년, 신생 대한민국의 정당성 위기

개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축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정부 수립 두 달 후인 10월, 여수에 주둔한 국군 2개 연대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좌익 장교들이 지휘권을 장악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500명이 넘는 경찰이 살해되었고,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시작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4월에는 제주도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나 5·10 총선이 무산되었습니다. 신생 대한민국은 탄생과 동시에 정당성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 위기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리고 이승만 정부는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했을까요?

역사적 배경

분단 선거의 딜레마

1947년 11월, UN 총회는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북한 지역에 UN 감시단의 입북을 거부하면서, 1948년 2월 UN은 “접근 가능한 지역”, 즉 남한만의 선거를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남한 정치를 분열시켰습니다.

찬성파 (이승만 중심):

  • “남한이라도 먼저 정부를 세우자”
  • “통일은 남한 정부 수립 후에”
  • 단독 선거 → 단독 정부 → 북진 통일

반대파 (김구·김규식 중심):

  • “남한만의 선거는 영구 분단”
  • “북한과 협상해야 한다”
  • 1948년 4월 평양 방문, 남북협상 시도

김구와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과 부주석이었습니다. 그들의 선거 보이콧은 신생 정부의 정당성에 심각한 타격이었습니다.

제주도의 특수성

제주도는 남한에서 좌익이 가장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인민위원회 지지율: 전체 인구의 70-80% (추정)

배경:

  • 역사적 차별: 육지에서 “섬놈”으로 멸시
  • 경제적 빈곤: 척박한 화산섬
  • 독특한 문화: 육지와 다른 방언, 관습
  • 해방 후 귀환민 6만 명: 일본에서 돌아온 청년들

1947년부터 제주에는 서북청년단이 파견되어 좌익을 탄압했습니다. 월남민 출신인 서북청년단의 폭력은 제주도민의 분노를 샀습니다.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대한 적개심이 좌익 봉기의 토양이 되었습니다.

전개 과정

제주 4·3: 선거를 막아라 (1948년 4월)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이 이끄는 약 4,000명의 무장대가 경찰서와 우익 인사를 동시에 공격했습니다.

봉기의 목표:

  1. 5·10 총선 저지
  2. 단독정부 수립 반대
  3. 통일 정부 수립

무장대는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거점을 두고 게릴라전을 펼쳤습니다. 5월 10일 총선에서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의 선거가 무산되었습니다. 투표율이 과반에 미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치안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선거의 정당성 자체가 흔들린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년 8월 15일)

제주도 봉기가 진행 중인 가운데, 5월 31일 제헌국회가 열렸고, 7월 17일 헌법이 공포되었습니다. 7월 20일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그러나 신생 정부의 기반은 취약했습니다.

정당성의 균열:

  • 김구·김규식: 선거 보이콧, 정부 불참
  • 제주도: 2개 선거구 미선출
  • 국회 내: 한민당과 이승만의 갈등
  • 군 내부: 좌익 세력 잔존

여순 반란: 군대가 배신하다 (1948년 10월)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제주도 진압을 위해 출동 명령을 받았지만, 연대 내 좌익 장교들이 지휘권을 장악한 것입니다.

반란군의 주장:

  • “동포를 학살하는 출동을 거부한다”
  • “친일 경찰을 타도하라”
  •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반란군은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인민위원회를 부활시켰습니다. 경찰 500명 이상이 살해되었습니다. 반란은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어 한때 전남·경남 일부가 반란군 통제 하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위험했던 이유:

  • 경찰 봉기가 아닌 군대 반란
  •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발생
  • “군대조차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메시지

진압과 UN 승인 (1948년 11월-12월)

이승만 정부는 총력을 기울여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여순 반란 진압 (10월 말):

  • 국군 2개 여단 투입
  • 미군 고문단 작전 지원
  • 10일 만에 여수 탈환
  • 잔여 병력은 지리산으로 이동, 게릴라전 지속

제주도 초토화 작전 (11월-):

  • 중산간 마을 강제 소개
  • 해안 5km 밖 출입 금지
  • 민간인 대량 희생 (최소 1.5만 명)

결정적 전환점: UN 승인 (12월 12일):

UN 총회는 결의 195호를 채택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습니다. 찬성 48, 반대 6(소련 블록), 기권 1.

이 승인의 효과:

  • 국제적 정당성 확보
  • 김구조차 “거대한 역사적 성취”라고 환영
  • 국내 반대파의 명분 약화
  •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입지 강화

State-building 관점의 분석

1. 정치 리더십: 이승만의 위기 관리

1946년 좌익 봉기 때와 마찬가지로, 이승만은 위기 속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내각 구성의 전략:

  • 한민당(야당) 인사 5명 입각 → 연립 형태
  • 민족청년단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 우익 청년단 통합
  • 전 공산당원 조봉암을 농림장관으로 → 좌익 포섭 제스처

UN 승인 활용:

  • 1948년 12월 승인 직후, 한민당과 타협
  • 내무차관에 한민당 인사 임명 → 반대파 무마
  • “국제 사회가 인정한 정부”라는 정당성 확보

2. 관료 기구: 강화된 국가

1946년과 달리, 1948년의 국가 기구는 훨씬 강력해져 있었습니다.

경찰:

  • 1945년 11월: 약 15,000명
  • 1946년 8월: 약 24,000명
  • 1948년 8월: 약 34,000명

군대:

  • 1946년: 국방경비대 약 20,000명
  • 1948년: 대한민국 국군 약 50,000명

지방 행정:

  • 1946년 10월: 지방 공무원 41,000명
  • 1947년 11월: 지방 공무원 92,000명 (2배 이상 증가)

국가 기구의 양적 성장이 진압 작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3. 사회 세력: 서북청년단의 명과 암

서북청년단은 이번에도 진압의 선봉에 섰습니다.

제주도 파견:

  • 1947년부터 수백 명 파견
  • 경찰 보조 역할
  • 좌익 색출 및 “예비 검속”

잔혹한 진압:

  • 무장대뿐 아니라 민간인 학살
  •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처형
  • 중산간 마을 초토화에 가담

서북청년단 없이는 진압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민간인 대량 학살이었습니다. 이것이 국가건설의 어두운 면입니다.

4. 외국: UN 승인의 결정적 역할

미국은 이중적 역할을 했습니다.

군사적 지원:

  • 미군 고문단이 작전 계획 수립
  • 무기와 탄약 지원
  • 직접 전투는 하지 않음 (책임 회피)

정치적 지원:

  • UN 총회에서 대한민국 승인 주도
  • 결의 195호 공동 발의 (미국, 중화민국, 호주)

UN 승인은 게임 체인저였습니다. 국내외에서 대한민국의 정당성이 공인되면서, 반대파의 명분이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선거를 보이콧했던 김구와 김규식도 UN 승인을 환영했습니다.

현대적 함의

1. 정당성은 어디서 오는가?

신생 대한민국은 두 가지 정당성 위기를 겪었습니다.

국내적 정당성 위기:

  • 김구·김규식의 불참
  • 제주도 선거 무산
  • 군대 반란

해결책:

  • UN 승인 (국제적 정당성)
  • 강력한 진압 (국내 통제력)
  • 야당과의 타협 (정치적 연합)

정당성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2. 국가건설의 폭력성

제주 4·3과 여순 반란 진압 과정에서 최소 2만 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대부분은 민간인이었습니다.

이것은 국가건설의 본질적 폭력성을 보여줍니다. 국가는 “합법적 폭력의 독점”입니다. 그 독점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비합법적 폭력이 동원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대한민국은 이 폭력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과거사 청산의 출발점입니다.

3. 정당성 vs. 안정의 딜레마

이승만 정부는 안정을 위해 정당성을 희생했습니다.

  • 친일 경찰 활용 → 효율적 진압 vs. 정당성 훼손
  • 서북청년단 동원 → 빠른 진압 vs. 민간인 학살
  • 초토화 작전 → 게릴라 섬멸 vs. 양민 희생

이 딜레마는 오늘날에도 반복됩니다. 국가 안보를 위해 인권을 얼마나 제한할 수 있는가? 1948년의 대한민국은 하나의 답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유일한 답은 아닙니다.


연표

1947.11.14  UN 총회, 한반도 총선 결의
1948.02.26  UN 소총회, 남한만의 선거 결정
1948.04.03  제주 4·3 무장 봉기 시작
1948.04.19  김구·김규식, 평양 방문 (남북협상)
1948.05.10  5·10 총선 (제주 2개 선거구 무산)
1948.05.31  제헌국회 개원
1948.07.17  대한민국 헌법 공포
1948.07.20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선출
1948.0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10.19  여순 반란 발생
1948.10.27  여수 탈환 (반란군 지리산 이동)
1948.11.17  제주도 계엄령 선포
1948.12.12  UN 총회, 대한민국 정부 승인 (결의 195호)
1949.01     한민당, 헌법 개정 요구 철회 (이승만 승리)

💡 수업 활용 TIP

  1. 토론 주제: “국가 안보와 인권, 무엇이 우선인가?”
  • 찬성: 국가가 먼저 안정되어야 인권도 보장된다
  • 반대: 인권을 유린하면서 세운 국가에 정당성이 있는가?
  1. 비교 분석: 1948년 대한민국 vs. 1954년 남베트남
  • 공통점: 분단 상황, 좌익 반란, 미국 지원
  • 차이점: UN 승인 유무, 지도자의 능력, 관료 기구의 강도
  1. 1차 사료 활용: UN 결의 195호 원문
  •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의 의미
  • 북한 정부의 법적 지위 논쟁
  1. 현대 연결: 과거사 청산
  • 제주 4·3 특별법 (2000년)
  • 여순사건 특별법 (2022년)
  • 국가 폭력과 기억의 정치

📚 추천 자료

학술서

  • Cumings, Bruce. 1990.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2*. Princeton University Press.
  • 양정심. 2001. “제주4·3항쟁과 국가테러리즘.” 한국현대사연구.
  • 이정식. 2012.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대중서

  • 서중석. 2010. 『대한민국 선거 이야기』. 역사비평사.
  • 제민일보 4·3취재반. 1994. 『4·3은 말한다』. 전예원.

사료

  • UN General Assembly Resolution 195 (III), 1948.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현대사 자료총서』.

영상 자료

  • KBS 다큐멘터리 『제주 4·3』 (2018)
  •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여순사건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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