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단은 어떻게 탄생했나?
개요
“그들은 경찰보다 더 무서웠다.”
1946년 가을, 좌익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경찰도, 미군도 아니었습니다.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우익 청년단이었습니다. 서북청년단, 한민청, 민족청년단으로 불린 이들은 대구와 전라도에서 좌익을 색출하고, 고문하고, 살해했습니다.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왜 국가가 아닌 민간 조직이 좌익 진압의 선봉에 섰을까요? 그리고 이들이 남한의 국가건설(State-building)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약한 국가 기구를 대신하여 남한의 반공 체제를 만든 것은 바로 사회 세력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 중심에 섰던 우익 청년단의 탄생과 역할을 추적합니다.
역사적 배경
왜 우익 청년단이 필요했나?
1945년 8월 해방 이후, 남한의 좌익은 빠르게 조직화되었습니다. 인민위원회가 131개 군에 설립되었고, 노동조합에 57만 명, 농민조합에 300만 명이 가입했습니다. 반면 미군정의 관료 기구는 너무나 약했습니다.
미군정의 인력 (1946년 10월):
- 총 인력: 3,721명 (미국인 절반 미만)
- 지방 주둔 미군: 도당 70-400명
- 경북 한 중대가 담당한 군: 12개
친일 경찰을 재고용했지만(전체 경찰의 82%), 이들은 정당성이 없었고 좌익의 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1946년 가을 좌익 봉기 동안만 200명 이상의 경찰이 살해되었습니다.
미군정은 깨달았습니다. 국가 기구만으로는 좌익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필요한 것은 좌익에 맞설 수 있는 우익 사회 세력이었습니다.
좌익의 선제적 조직화
우익 청년단의 등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좌익이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고, 9월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전국에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어 사실상의 지방정부 역할을 했습니다.
1945년 11월, 조선공산당은 전국노동조합평의회를 조직했고, 12월에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을 창설했습니다. 학생, 청년, 여성 조직도 잇달아 만들어졌습니다.
1946년 상반기까지 우익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김구의 한국독립당,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있었지만, 대중 동원력은 좌익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반탁 운동과 우익의 각성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었습니다. 좌익은 소련의 입장을 따라 찬탁으로 돌아섰고, 우익은 반탁으로 단결했습니다.
1946년 1월, 반탁 시위가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우익 청년,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좌익 사무실을 습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익은 처음으로 대중 동원의 맛을 보았습니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은 깨달았습니다. 좌익과 맞서려면 청년을 조직해야 한다고. 그렇게 우익 청년단이 하나 둘씩 탄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세 개의 우익 청년단
1. 한민청 (1946년 4월): 이승만의 사병
정식 명칭: 대한민주청년동맹 (大韓民主靑年同盟)
창설: 1946년 4월
지도자: 이승만 (명예총재), 김구, 김규식
한민청은 서울의 깡패 조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종로, 을지로, 명동의 건달들이 주축이었고, 좌익 노동자들과 주먹다짐을 벌이던 이들이 조직화된 것입니다.
특징:
- 서울 중심
- 경찰과의 긴밀한 협력
- 이승만의 직접 후원
- 폭력성과 실용성
주요 활동:
-
- 1946년 9월: 철도 파업 진압
– 경찰로부터 소총과 수류탄 지급받음
– 약 2,000명 동원
-
- 1946년 10월: 대구 폭동 진압
– 경북 지역에 수천 명 파견
– 40명 이상 사상자 발생
한민청은 미군정과 경찰의 비공식 무장 조직이었습니다. 법적 근거도, 공식 승인도 없었지만, 미군정은 묵인했고 경찰은 무기를 제공했습니다. 좌익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2. 서북청년단 (1946년 8월): 월남민의 복수
정식 명칭: 서북청년회 → 서북청년단
창설: 1946년 8월
지도자: 문봉제 (이승만 측근, 황해도 출신)
서북청년단은 다른 청년단과 결이 달랐습니다. 이들은 북한에서 내려온 월남민이었습니다.
월남민의 배경:
- 대부분 20-30대 청년
- 황해도, 평안도 출신
- 소련군과 북한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남하
- 가족, 재산을 북에 두고 옴
이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토지개혁으로 땅을 빼앗겼고, 기독교 탄압으로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소련군에게 폭행당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남한의 좌익은 그들에게 단순한 정치적 적이 아니라 복수의 대상이었습니다.
특징:
- 극렬한 반공 이데올로기
- 조직력과 전투력
- 전국 조직 (특히 영남, 호남)
- 가장 폭력적
주요 활동:
- 1946년 8월: 좌익 노조 습격
- 1946년 10월: 대구·경북 봉기 진압에 선봉
- 1948년 4-5월: 제주 4·3 사건 진압
- 1948년 10월: 여수순천 반란 진압
서북청년단은 좌익뿐만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폭력으로도 악명 높았습니다. 좌익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납치하고,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법도, 절차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반공이 곧 정의였습니다.
3. 민족청년단 (1946년 10월): 미군정의 정예 부대
정식 명칭: 조선민족청년단
창설: 1946년 10월 9일
지도자: 이범석 (李範奭, 전 광복군 부사령, 초대 국무총리)
민족청년단은 미군정이 직접 만든 우익 청년단이었습니다.
미군정의 지원:
- 창설 자금: 500만 원
- 최고 고문: 어니스트 보스(Ernest Voss) 대령 (미군 정보장교)
- 목표: “우익 청년 군대” (Rightist Youth Army)
이범석은 1920-30년대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의 부사령을 지냈습니다. 군인 출신답게 민족청년단은 군대식 조직과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했습니다.
강령:
- “민족지상 국가지상” (民族至上 國家至上)
- 개인보다 민족, 민족보다 국가
- 반공과 건국
특징:
- 군사 훈련
- 엄격한 위계질서
- 전국 조직 (가장 큰 규모)
- 미군정의 공식 승인
민족청년단은 한민청, 서북청년단과 달리 합법적 조직이었습니다. 미군정의 승인을 받았고, 자금을 지원받았으며, 공식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범석이 초대 국무총리가 되면서, 민족청년단은 정부 여당의 핵심 조직이 되었습니다.
State-building 관점의 분석
사회 세력이 국가를 만들다
State-building 이론에서 4대 행위자는 정치 리더십, 관료 기구, 사회 세력, 외국입니다. 1946-48년 남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회 세력이었습니다.
왜 사회 세력이 중요했나?
국가 기구의 약함: 미군정 인력 3,721명, 경찰의 82%가 친일파
좌익의 강함: 인민위원회 131개 군, 노조 57만 명, 농민조합 300만 명
정당성의 부재: 미군정도, 친일 경찰도 민중의 지지가 없었음
결국 우익 사회 세력이 국가 기구를 대신했습니다. 한민청,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이 좌익 봉기를 진압했고, 인민위원회를 해체했으며, 반공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State-building의 핵심입니다: 국가가 약할 때, 사회 세력이 국가를 만듭니다.
폭력의 외주화
미군정은 폭력을 외주화했습니다.
미군이 직접 좌익을 진압하면 국제적 비난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경찰이 진압하면 정당성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미군정은 우익 청년단에게 진압을 맡겼습니다.
- 한민청에게 총과 수류탄을 주었습니다.
- 서북청년단의 폭력을 묵인했습니다.
- 민족청년단에게 500만 원을 지원했습니다.
우익 청년단은 국가가 할 수 없는 더러운 일을 했습니다. 고문, 납치, 살인. 법적 절차 없이, 증거 없이, 좌익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제거했습니다.
그 결과 남한은 반공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폭력적이었고, 불법적이었으며, 비인간적이었습니다.
괴물의 탄생
우익 청년단은 국가건설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통제 불능의 괴물이 되었습니다.
1948년 제주 4·3 사건:
-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 파견되어 무장 봉기 진압
- 민간인 학살 자행
- 제주도민 10명 중 1명 사망 (3만 명 추정)
1948년 여수순천 반란:
- 서북청년단과 민족청년단이 진압에 참여
- 좌익 토벌 과정에서 민간인 수천 명 사망
1950년대 이승만 독재:
- 우익 청년단이 이승만의 사병 역할
- 야당 탄압, 선거 폭력, 정적 제거
미군정과 이승만은 우익 청년단을 이용했지만, 통제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은 국가 위에 군림하는 준군사 조직이 되었고,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현대적 함의
1. 국가 독점 폭력의 중요성
막스 베버는 “국가는 폭력의 합법적 독점”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국가만이 폭력을 사용할 수 있고, 그 폭력은 법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946년 남한은 달랐습니다. 사회 세력이 폭력을 행사했고, 그 폭력은 법의 통제를 받지 않았습니다. 우익 청년단의 폭력은 국가 폭력보다 더 무자비했고, 더 자의적이었습니다.
이것이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요?
- 법치주의의 약화
- 사적 폭력의 정당화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사고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법치주의는 1946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2. 반공 이데올로기의 기원
서북청년단의 극렬한 반공주의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북한에서의 경험이었습니다.
토지개혁으로 땅을 빼앗긴 지주의 아들, 교회 폐쇄로 신앙을 잃은 기독교인, 소련군에게 폭행당한 청년.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트라우마였습니다.
이 트라우마는 남한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1948년 국가보안법, 1950년대 레드 컴플렉스, 1960-80년대 반공 교육. 모두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3. 과거사의 그림자
우익 청년단의 폭력은 오늘날까지 논쟁거리입니다.
- 제주 4·3 사건: 2000년 특별법, 2014년 추가 진상조사
- 여수순천 반란: 여전히 “반란”인가 “항쟁”인가 논쟁
- 서북청년단: 2020년 국가폭력 피해자 인정 논란
국가건설에 기여했지만,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역사는 흑백이 아닙니다. 우익 청년단은 영웅도, 악당도 아닙니다. 그들은 국가건설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연표
1945.12.27 모스크바 3상 회의 (신탁통치안)
1946.01 반탁 운동 확산
1946.04 한민청 창설 (이승만 후원)
1946.08 서북청년단 창설 (월남민 중심)
1946.09 한민청, 철도 파업 진압에 동원 (2,000명)
1946.10.01 대구 폭동 발생
1946.10.09 민족청년단 창설 (이범석, 미군정 500만 원 지원)
1946.10 서북청년단·한민청, 대구·경북 봉기 진압 (수천 명 동원)
1946.11 전라도 봉기 진압
1948.04 제주 4·3 사건 (서북청년단 파견)
1948.10 여수순천 반란 진압 (서북청년단·민족청년단)
1948.0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
💡 수업 활용 TIP
토론 주제: “국가건설에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 찬성: 좌익 봉기를 막기 위해 불가피했다 (국가 안보 우선)
– 반대: 민간인 학살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인권 우선)
비교 분석: 우익 청년단 vs. 나치 돌격대(SA)
– 공통점: 정당의 사병 조직, 폭력 행사, 정적 제거
– 차이점: 목적(반공 vs. 인종주의), 규모, 국가 통제 여부
1차 사료: 서북청년단원의 증언
– “우리는 북에서 공산당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복수는 정당하다.”
→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메커니즘
현대 연결: 제주 4·3, 여수순천
– 과거사 정리와 국가 폭력
– 가해자 vs. 피해자 vs. 국가의 책임
영화 자료:
– <화려한 휴가> (광주, 국가 폭력)
– <택시운전사> (외신 기자 시점)
→ 국가 폭력의 반복 패턴
📚 추천 자료
학술서
- Cumings, Bruce. 1990.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2. Princeton University Press.
- 김득중. 2018. 『서북청년회 연구』. 선인.
- 이정식. 2012.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대중서
- 서중석. 2020.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오월의봄.
- 정병준. 2008.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사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현대사 자료총서』 – 정당·사회단체 편.
- 제민일보 4·3취재반. 1994. 『4·3은 말한다』. 전예원.
한국의 국가건설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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