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국가건설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
개요
“죽어야 살 수 있다.”
1948년 11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군 지휘관은 해안선에서 5km 떨어진 중산간 지역을 “적성지역”으로 선포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했습니다. 마을은 불탔고, 주민들은 해안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따르지 않으면 죽음이었습니다.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까지, 제주도에서 최소 1만 5천 명에서 3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 28만 명의 10분의 1입니다. 대부분은 무장대가 아닌 민간인이었습니다.
왜 신생 대한민국은 자국민을 학살했을까요? 이 비극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역사적 배경
제주도, 왜 그곳이었나
제주도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 섬이었습니다. 육지와 100km 떨어진 이 화산섬은 역사적으로 차별받아왔습니다.
역사적 소외:
- 조선시대: 유배지, “섬놈”이라는 멸시
- 일제시대: 강제 징용, 해녀 착취
- 해방 후: 콜레라 만연, 흉작, 실업
해방 후 귀환민:
- 일본에서 약 6만 명 귀환 (인구의 20%)
- 대부분 20-30대 청년
- 오사카 등지에서 노동운동 경험
- 실업 상태로 귀향
이들 귀환 청년들은 인민위원회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제주 인민위원회는 남한에서 가장 강력했고, 주민 지지율도 높았습니다.
1947년, 충돌의 시작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 후 시위대가 경찰에 의해 발포당했습니다. 6명이 사망했습니다. 이에 항의하는 총파업이 벌어졌고, 제주 전역의 학교, 관공서, 기업이 마비되었습니다.
미군정의 대응:
- 응원 경찰 421명 파견
- 서북청년단 수백 명 투입
- “빨갱이 섬” 낙인
서북청년단의 등장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북한에서 토지와 가족을 잃고 내려온 이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복수”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폭력은 경찰보다 더 무자비했습니다.
1947년 3월-1948년 3월 (1년간):
- 검거자: 2,500명
- 고문 사망: 다수 (정확한 숫자 불명)
- 주민과 경찰/서북청년단 갈등 격화
4·3의 도화선: 5·10 선거
1948년 초, UN은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결정했습니다. 제주의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은 이를 “민족 분단의 음모”로 규정하고 무장 봉기를 결정했습니다.
봉기 지도부의 목표:
- 5·10 선거 저지
- 단독정부 수립 반대
- 미군 철수 요구
무장대 규모:
- 핵심 병력: 약 500명
- 동원 가능 인원: 약 4,000명
- 무기: 일본군 잔여 총기, 죽창, 농기구
이들은 한라산(1,950m) 중산간 지역에 거점을 두고 게릴라전을 준비했습니다.
전개 과정
봉기: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오름마다 봉화가 올랐습니다. 이것이 공격 개시 신호였습니다.
동시다발 공격 대상:
- 경찰 지서 11곳
- 우익 인사 자택
- 서북청년단 숙소
피해:
- 경찰·우익 측: 사망 12명, 부상 4명
- 무장대: 사망 2명
봉기 첫날의 사상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무장대의 목표는 “경찰 제압”보다 “선거 방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봉기가 불러온 파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5·10 선거 무산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제주도 결과:
- 북제주군 갑 (제1선거구): 투표율 과반 미달 → 선거 무효
- 북제주군 을 (제2선거구): 투표율 과반 미달 → 선거 무효
- 남제주군 (제3선거구): 선거 실시, 당선자 배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오직 제주도 2개 선거구만 선거가 무산되었습니다. 무장대의 1차 목표는 달성된 것입니다.
무산의 의미:
- 대한민국 정부의 정당성에 흠집
- “선거조차 치르지 못한 지역”이라는 오명
- 중앙정부의 제주에 대한 적대감 심화
협상 시도와 실패
1948년 4-5월, 군정 책임자와 무장대 사이에 협상이 시도되었습니다.
4월 28일 협상 (김익렬 연대장 vs. 김달삼 무장대장):
- 72시간 내 전투 중지 합의
- 무장대 점진적 하산 논의
협상 실패 원인:
- 우익 청년단의 방화 사건 (오라리 방화)
- 미군정의 강경 노선
- 5·10 선거 강행
협상 실패 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습니다.
초토화 작전: 1948년 11월-1949년 3월
1948년 10월, 여순 반란이 발생했습니다. 제주도 진압을 위해 출동하던 국군 부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부를 경악시켰고, 제주도에 대한 강경 노선을 확정시켰습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초토화 작전의 내용:
- 해안선 5km 금지령
- 중산간 마을은 “적성지역”
- 해당 지역 주민은 모두 “폭도 협조자”
- 48시간 내 해안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사살
- 마을 소각
- 중산간 95% 마을 소각
- 약 130개 마을이 잿더미로
- 예비 검속
- 무장대 가족, 행방불명자 가족 검거
- “도피자 가족” 처형
학살의 현장:
“군인들이 마을로 들이닥쳐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도망치는 사람은 총에 맞았다. 우리 어머니는 불타는 집에서 뛰어나오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 생존자 증언
정촌 마을 (1949년 1월 17일):
- 주민 139명 집단 학살
- 임산부, 노인, 어린이 무차별 처형
- 마을 전체 소각
북촌리 (1949년 1월 17일):
- 주민 약 400명 학살
- 마을 인구의 절반 이상
-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집단 처형
서북청년단의 역할
서북청년단은 초토화 작전의 선봉에 섰습니다.
제주 파견 규모: 수백~천여 명 (추정)
역할:
- 마을 수색 및 “빨갱이” 색출
- 심문 및 고문
- 처형 집행
- 경찰·군 보조
잔혹함의 원인:
- 북한에서의 트라우마 (토지개혁, 기독교 탄압)
- “공산주의자에 대한 복수”라는 이데올로기
- 법적 통제의 부재
- 중앙정부의 묵인
서북청년단원들에게 제주도민은 “똑같은 빨갱이”였습니다. 북한에서 겪은 공포와 분노가 제주도에서 폭발한 것입니다.
피해 규모
인명 피해 (추정):
- 사망자: 25,000~30,000명
- 제주도 인구(28만)의 약 10%
- 학살 피해자의 80%는 토벌대(군·경·서북청년단)에 의한 것
- 무장대에 의한 피해: 약 20%
마을 피해:
- 소각 마을: 약 130개 (중산간 95%)
- 파괴된 가옥: 39,285동
기간: 1948년 4월 3일 ~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입산 금지 해제)
State-building 관점의 분석
1. 국가 기구가 사회를 파괴할 때
제주 4·3은 국가건설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국가가 사회를 파괴한 것입니다.
초토화 작전의 논리:
- 게릴라를 고립시키려면 민간인을 분리해야 한다
- 민간인이 협조하면 게릴라로 간주한다
- 의심스러우면 죽인다
이것은 마오쩌둥의 게릴라 이론을 거꾸로 적용한 것입니다. “게릴라는 물고기, 인민은 바다”라면, 바다를 말려 물고기를 잡는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바다”는 자국 국민이었습니다.
2. 폭력의 외주화와 책임 회피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폭력을 외주화했습니다.
외주화 구조:
- 미군: 작전 계획 수립, 무기 지원, 직접 개입 회피
- 국군: 초토화 작전 실행
- 경찰: 예비 검속, 처형
- 서북청년단: 가장 잔혹한 현장 폭력
이 구조에서 최종 책임자는 불분명해집니다. 미군은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고, 국군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서북청년단은 “애국 활동”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책임의 분산이 학살의 확대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3. 이데올로기의 힘
“빨갱이”라는 낙인은 학살을 정당화했습니다.
탈인간화(Dehumanization):
- 제주도민 = “빨갱이” = 인간이 아닌 존재
-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
- 민간인/무장대 구분 불필요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무서움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학살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인간이 아니다”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서북청년단원들은 악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북한에서 고통받은 피해자였습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때, 폭력은 연쇄됩니다.
4. 국가건설의 대가
제주 4·3은 대한민국 국가건설의 대가를 보여줍니다.
이승만 정부의 계산:
- 제주도 진압 없이는 정부 안정 불가
- 좌익 잔존 세력 완전 소탕 필요
- 민간인 피해는 “불가피한 희생”
실제 결과:
- 무장대 거의 소멸 (1949년 중반)
- 그러나 민간인 3만 명 사망
- 제주도민의 트라우마 (수십 년간 침묵)
- “빨갱이” 낙인으로 연좌제 적용
국가는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국가는 제주도민에게 폭력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현대적 함의
1. 과거사 청산의 여정
제주 4·3은 한국 과거사 청산의 시금석입니다.
2000년: 제주4·3특별법 제정
2003년: 노무현 대통령, 국가 차원 첫 사과
2006년: 4월 3일, 국가 기념일 지정
2018년: 문재인 대통령, 70주년 추념식 참석
2021년: 희생자 공식 추가 인정 (현재도 진행 중)
그러나 여전히 논쟁은 계속됩니다.
- “폭동”인가 “항쟁”인가?
- 무장대의 폭력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서북청년단과 가해자 처벌은?
2. 국가 폭력과 기억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제주 4·3은 오랫동안 금기였습니다. “빨갱이”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생존자들은 침묵했습니다. 자녀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야 진상 규명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50년 만에 국가가 사과했습니다.
기억의 의미:
- 피해자에 대한 예우
- 가해 구조에 대한 성찰
- 반복 방지를 위한 교훈
3. 보편적 교훈
제주 4·3은 한국만의 비극이 아닙니다.
유사 사례:
- 인도네시아 공산당 학살 (1965-66): 50만~100만 명
- 캄보디아 킬링필드 (1975-79): 170만~250만 명
- 르완다 대학살 (1994): 80만 명
공통점:
- 이데올로기에 의한 탈인간화
- 국가 기구의 조직적 폭력
- 민간인 학살
- 오랜 침묵 후 진상 규명
국가가 국민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제주 4·3이 주는 가장 무서운 교훈입니다.
연표
1947.03.01 3·1절 발포 사건 (6명 사망) 1947.03.10 제주 총파업 시작 1947.03- 서북청년단 제주 파견 시작 1948.04.03 무장 봉기 발발 (4·3의 시작) 1948.04.28 김익렬-김달삼 협상 (실패) 1948.05.10 5·10 선거 (제주 2개 선거구 무산) 1948.0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10.19 여순 반란 발생 1948.11.17 제주도 계엄령 선포 1948.11- 초토화 작전 시작 1949.01.17 북촌리 학살 (약 400명) 1949.03 초토화 작전 최고조 1949.06 무장대 거의 소멸 1954.09.21 한라산 입산 금지 해제 (4·3 공식 종결) 2000.01 제주4·3특별법 제정 2003.10.31 노무현 대통령, 국가 공식 사과
💡 수업 활용 TIP
- 토론 주제: “국가 안보를 위해 민간인 희생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 역사적 맥락과 현대적 가치의 충돌
- 냉전 이데올로기 vs. 인권
- 비교 분석: 제주 4·3 vs. 베트남 미라이 학살 (1968)
- 공통점: 대게릴라전, 민간인 학살, 은폐 시도
- 차이점: 국제적 반응, 과거사 청산 과정
- 1차 사료 활용: 생존자 증언
- 제주4·3평화재단 증언록
- 구술사의 역사적 가치
- 현대 연결: 과거사 청산의 의미
- 왜 50년이 지나서야 사과했나?
- 독일 vs. 일본 vs. 한국의 과거사 청산 비교
- 영화/다큐멘터리:
- 영화 <지슬> (2012) – 초토화 작전 시기 마을 이야기
- 다큐 <레드헌트> (2017) – 제주 4·3과 연좌제
- KBS <제주 4·3> (2018)
📚 추천 자료
학술서
-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 Cumings, Bruce. 1990.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2*. Princeton University Press.
- Merrill, John. 1982. “The Cheju-do Rebellion.” *Journal of Korean Studies* 2.
대중서
- 현기영. 1978. 『순이삼촌』. (소설, 4·3 최초의 문학적 형상화)
- 김석범. 『화산도』. (재일교포 작가의 대하소설)
- 허영선. 2019.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서해문집.
사료
- 제민일보 4·3취재반. 1994-1998. 『4·3은 말한다』 전5권.
- 제주4·3평화재단. 『4·3 증언록』 시리즈.
영상 자료
- 영화 <지슬> (2012, 오멸 감독)
- 다큐멘터리 <비념> (2012)
- KBS 다큐멘터리 <제주 4·3 70년, 그들은 왜> (2018)
웹사이트
- 제주4·3평화재단: https://www.jeju43peace.or.kr
한국의 국가건설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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